숲속에 길이 있습니다. 꼭대기나 산사에 오르내리는 길. 나무를 하거나 사냥을 하는 길. 험하고 수려해서 구경거리인 그런 길입니다. 그리 험하지도 빼어나지도 않은 길도 있습니다. 이웃 마을로 가는 길이죠. 사람을 만나거나 장 보러 가는 길. 도회지나 타관에 일이 있어 출타하는 길. 신작로가 됐거나 사라져 흔적만 남은 엇갈린 운명의 길입니다.
지리산에 둘레길이 열렸다기에 맘이 설렜습니다. 산, 숲, 바람, 하늘, 그리고 이웃과 소통하는 그 길. 꼭 가보고 싶었거든요. 길을
나서는 이는 다르지만 마음은 같을 거라 여겼습니다. 그리운 이웃과 정다운 자연을 만나러 가는 길이니까요. 길 너머 꼭 붙들어야 할 게 없으니
서두를 필요는 없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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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여름 더위를 피한답시고 지리산에 찾아 들었습니다. 피서라기보다 휴양이라 해야 좀 더 어울리겠습니다. 총각시절엔 여름에 종종 찾곤 하던 곳인데, 이젠 어렴풋합니다. 벌써 낯선 품으로 다가오는 가 봅니다. 10수년이니 좀 서먹할 때가 된 것이겠죠?
늘 마음속 고향으로 남은 지리산
남도가 좋아서, 산신 노고할머니 품이 다정해서, 섬진강 꼬부랑길이 보고 파서 늘 가슴속 고향으로 남아 있는 땅. 8백리 지리산 둘레길이
트였다니 반갑기도 하고 궁금했었거든요. 한걸음에 달려오고 싶었지만 그리 안 되더이다. 지친 몸 추스르기가 쉽지가 않았거든요.
까닭을 잘 모르겠으나 우연찮게 한가해진 여름. 지리산을 택한 건 당연지삽니다. 여유롭게 다시 마주하니 우연치고는 큰 행운인 셈이죠? 망설일 게 없습니다. 물통 하나 들고 그냥 길을 나서면 되니까요. 오가다 아는 척 했던 들꽃과 나무, 그리고 지친 나그네의 등줄기를 식혀주던 그 바람이 그리웠으니까요.
다들 가마솥더위에 지쳐있을 때쯤 될 겁니다. 기자가 지리산 둘레길 3코스를 찾은 건 3일 오전 10시. 전라북도 남원시 인월면에서
경상남도 함양의 금계마을로 이어지는 숲길 초입에 들어선 게. 모르면 물어가라 했죠? 다행이도 기자가 들어선 길에 안내센터가 있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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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순례길의 공식 명칭은 '지리산 숲길'입니다. 어떤 취지에선지 몰라도 산림청이 추진한 사업이더군요. 헐고, 짓고, 포장하는 막개발이 아닌 오래전부터 있던 길을 이어 놓은 것이니 그리 나무랄 건 없겠네요. 사람을 숲으로 불러들이는 것 자체가 문제이긴 하지만요.
지리산을 한 바퀴 돌 수 있는 8백리 길은 아직 완성되지 않았다고 하네요. 남원의 주천면에서 운봉, 인월, 금계, 동강, 그리고
경남 산청군 수철마을로 이어지는 지리산 북쪽 둘레 2백여리(정확히 71km)만 트였답니다. 남은 5백여리도 곧 이어진다고 하니 그 때가서야
완성됐다고 하겠죠?
지친 나그네 등줄기 식혀주는 바람
오르막을 지나 마을로 들어서면 반기는 담과 가옥. 외양간 곁 모퉁이를 지나치면 탁 트이며 나타나는 다랭이논과 시원한 바람. 논둑을 지나
대나무 숲을 굽이굽이 내려서면 마주하는 무당의 땅. 적송과 잣나무 울창한 숲길을 막 벗어나면 시원스럽게 쏟아지는 계곡물. 어쩌다 스치는 웃음과
다정한 인사. 계곡 어디쯤인가 아낙의 평상에서 마시는 막걸리 한잔.
그러니까 둘레길은 인생여정인 셈입니다. 힘들면 쉬어가고, 원기를 회복하면 또 출발하고... 숲을 막 헤쳐 나가면 시원한 벌판이 나타나고. 벌판 끝 땀 흘려 다다르면 기다렸던 차가운 바람이 더운 몸뚱이를 식혀주고. 지쳐 주저앉고 싶을 때 어쩌다 스치는 인연이 부추겨주는 삶의 역정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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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내센터 벽 어디엔가 이렇게 써놨더군요.
"지리산 둘레 8백리길/ 곧장 오르지 않고 에둘러 가는 길/ 숲속 오솔길을 따라 고개를 넘어/ 마을과 사람을 만나는 길/ 들녘을 따라 삶을 배우고/ 강 건너 물결이 일렁이는 바람을 따라/ 자기를 만나고 돌아오는 순례의 길..."
지리산을 찾아들며 막 제 머릿속에 떠오른 길이 하나 있습니다. 어릴 적 살던 산골마을에서 외가를 가려면 험한 재를 하나 넘어야
했습니다. 한나절은 걸어야 하죠. 신작로를 따라 가려면 물론 더 걸리죠. 하루에 두어 번 다니는 버스는 시간 맞추기도 어렵고요. 그러니 엄마는
친정 나들이를 할 때면 그 길로 다닙니다.
제가 그 길에 동행하려면 보통 악다구니로는 어림도 없습니다. 볼기 몇 대 맞을 각오를 해야죠. 한나절 울고불고 생떼를 써야 하기도
하고요. 그렇게 간신히 따라나서면 정말 기분 최고죠. 엄마 곁에 머무는 게 왜 그리 좋았는지. 한나절이 아니라 며칠을 걷어도 즐거웠을 겁니다.
그리고 그 길 끝엔 외가의 사랑이 있었고요.
삶을 배우고 자기를 만나는 순례길
동네를 가로질러 작은 언덕을 하나 넘으면 학교 운동장 서너개만 한 들판이 기다립니다. 나락이 익어가는 논둑길. 강낭콩과 메주콩도 그 길 한편에서 맞이하죠. 굽이굽이 논길을 지나 산이 막 시작되는 곳. 저수지 제방을 따라 갈지자 길을 오르면 시원한 바람이 등줄기를 식혀줍니다. 작은 저수지를 에둘러 끝에 이르면 산길이 시작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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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식을 떼놓고 친정나들이에 나서려다 실패한 엄마. 평소 묻거나 들려주지 않던 별의별 이야기를 다 해줍니다. 외할아버지, 외삼촌, 외숙모. 나 태어나기도 전에 돌아가신 외할머니 이야기. 아버지와 결혼하기 전 만주 봉천에서 봉제 일을 한 이야기까지 듣고 나면 험한 솔티(?)재 마루에 섭니다.
우리집이 손톱만 해 보입니다. 그 곁 올망졸망 모여 있는 30여 가구. 동네가 마치 미술시간에 그려놓은 그림 한 장보다 작습니다.
몸을 돌려 외가마을을 살핍니다. 어디가 어딘지 모르니 엄마가 알려주죠. 내 눈엔 모두가 낯설기만 합니다. 그리고 시원한 바람을 맞으며 외가댁으로
하산을 시작하죠.
중학생이 돼서야 동네 밖으로 외출을 시작한 기자는 외가 가는 길을 알게 됐고, 동네 인근의 지형도 파악하게 됐습니다. 신작로를 따라
차를 타고 가면 고작 20분이면 닫는 길이지요. 차가 한나절에 한 대나 올까 말까 하니, 차타는 곳까지 걸어가고, 기다리고, 차에서 내려 다시
외가까지 걷는 걸 생각하면 산길이 더 빠른 셈입니다.
그러니까 산길 나들이는 우리집, 외가의 역사를 엄마로부터 자세히 들을 수 있는 흥미진진한 '스토리텔링' 수업이었죠. 우리 마을,
이웃 마을의 지리를 알려줬고, 그 길 어딘가에서 땔감이나 농사에 쓸 나무를 주는 울창한 숲이 있는 것도 알았습니다. 숲 사이로 흐른 물이
저수지를 채우고 넘쳐 우리 마을을 거쳐 아래 마을로 흐르는 것도 깨달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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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촌댁, 아들 데리고 친정가누만"
숲길 어딘가에서 만나는 인연은 소중합니다. 친한 이든 아니든 상관없습니다. 서로의 안부를 묻고 희로애락을 나누죠. 재를 넘어 외가댁 쪽으로 산을 내려가면 엄마는 제가 모르는 모든 사람과 아는 체를 합니다. 스치는 이마다 인사를 하고 웃음을 나누죠. 이젠 희미해진 인사지만 이랬습니다. "성촌댁, 아들 데리고 친정가시는구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