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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하고 싶은 이야기

1년간의 클로징멘트를 통해 본 앵커 신경민의 힘


"올 한해 클로징멘트에서 하고 싶었던 얘기는 원칙이 숨 쉬면서 곳곳에 합리가 흐르는 사회였습니다. 그것은 민주주의, 책임, 신뢰, 안전이었고 힘에 대한 감시와 약자배려를 뜻합니다. 내용을 두고 논란과 찬반이 있다는 점 알고 있습니다. 불편해 하는 분들에게 미안하지만 이 꿈과 소망은 바꾸거나 버릴 수 있는 게 아닙니다. 함께 가져야 하는 겁니다. 2009년 첫날인 내일 돌아오겠습니다."(2008년 12월 31일)

"회사결정에 따라 오늘 자로 물러납니다. 그 동안의 제 원칙은 자유, 민주, 힘에 대한 견제, 약자 배려 그리고 안전이었습니다. 하지만 언론의 비판을 이해하려고 하지 않아 답답하고 암울했습니다. 구석구석, 매일매일 문제가 도사리고 있어 밝은 메시지를 전하지 못해 아쉽지만 희망을 품을 내일이 언젠가 올 것임을 믿습니다. 할 말은 많아도 제 클로징멘트를 여기서 클로징하겠습니다."(2008년 4월 13일)

"(이명박 대통령이 서울로 돌아와 청와대 첫 밤을 보냅니다. 하지만 지척에 집회 소리로 조용하지는 않을 겁니다. - 박혜진 앵커 멘트) 이 대통령의 사과 담화대로 소통만이 부족했는지 아니면 첫 진단부터 문제였는지 진심을 갖고 사람다운 사람과 소통해야 합니다. 시간도 넉넉해 보이지 않습니다. 출범 100일인 오는 3일과 9일 국민과의 대화를 기대해 보겠습니다."(2008년 5월 30일)

 

"(오늘 청와대 회견은 한 달 전 담화보다 훨씬 감성적이었습니다.'뼈저린 반성과 자책'이라는 표현과 또 '청와대 뒷산에 올라 아침이슬을 들었다'는 부분이 그렇습니다. 이 뒷산 부분은 대통령이 직접 썼다고 합니다.- 박혜진 앵커 멘트) 쇠고기 부분에서는 담화와 비슷했습니다. 협상을 서둘렀음을 인정한 점이 달라졌습니다. 대운하는 사실상 포기로 들립니다. 다만 '국민이 반대한다면'이라는 단서에 아쉬움이 진하게 묻어납니다."(2008년 6월 19일)

 

"(이명박 대통령이 로스앤젤레스 주식 발언을 해 소란하자 오늘 청와대 관계자가 해명했습니다. 이로써 발언 소동이 한 차례 더 추가됐습니다.- 박혜진 앵커 멘트) 이번에도 안타까운 점은 청와대가 이미 카메라에 찍힌 발언을 없었던 것으로 만들려고 애쓴 대목입니다. 조선과 중앙일보가 즉각 오늘 아침 사설에서 매섭게 비판한 점은 특히 눈에 띕니다."(2008년 11월 26일)

"(한진희 서울경찰청장이 갑자기 바뀐 배경에 관심이 쏠리고 있습니다. 공식 설명은 피곤이 쌓이고 연말 정년퇴임을 앞두고 스스로 그만둔다는 겁니다.- 박혜진 앵커 멘트) 다섯 달도 안 돼 서울경찰청장 바꾸는 건 이례적인 인사입니다. 최근 한 청장의 집회시위 대응을 둘러싼 내외부의 평가 때문에 경질됐다는 관측이 돌아다니고 있습니다."(2008년 7월 22일) 

 

"(촛불집회 사건 몰아주기 배당에 대해 법원 고위층은 정상적이고 적법해서 문제로 여기지 않는다고 공식으로 답했습니다.- 박혜진 앵커 멘트) 그렇다면 법원장과 수석 판사가 그 당시에 무작위 배당으로 바꾼 건 평판사들 힘에 밀려서 그랬다는 얘기입니다. 70~80년대 어두운 시절, 법원이 누가 알까봐 숨어서 몰래 배당한 것은 왜 그랬는지 모르겠습니다. 법원 답변이 너무나 법 공부한 사람 같지 않아서 내일 다시 묻겠습니다."(2009년 2월 23일)

 

"(오늘 이 메일에서 사법부의 현재 모습, 배당에서 판결까지, 또 지방 법원에서 대법원까지가 그대로 나타났습니다. - 박혜진 앵커 멘트) 이상했던 시절의 이상한 사법부가 왜 2008년 이 시점에 다시 나타났을까요. 출세욕과 인사구조 때문에 계속 그래왔을까요, 또는 이번에 우연히 내 외부 여건으로 그런 걸까요? 답과 방안을 찾지 못한다면, 법원 간판만 바꾸느라 소란하다가 도로 사법부가 될 수 있습니다."(2009년 3월 5일)

"(여대생 머리를 짓밟는 군화와 직사 물대포에서 공권력의 정당한 집행은 읽을 수 없었습니다. 경찰 수뇌의 다급함과 피곤한 전경의 화풀이만 보였습니다.- 박혜진 앵커 멘트) 이렇게 많은 열성 시민이 주말 새벽부터 밤까지 왜 그랬을까요. 만약에 배후가 있었다면 이런 시민을 동원할 수는 없었을 겁니다. 정부와 경찰이 아직도 디지털시대와 시민 분노를 이해하지 못 하고 7080식으로 대처했습니다."(2008년 6월 2일)

 

"(거액을 기부해 온 탤런트 문근영씨에게 악플이 달렸습니다. 이 악플은 문씨의 기부와 상관없는 고향과 외조부 내력까지 들춰내고 있습니다.- 박혜진 앵커 멘트) 이래가지고는 한국 사회에서 무슨 일을 할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오히려 악플러가 측은해 보입니다."(2008년 11월 17일) 

 

"(22년 전 오늘, 87년 6·10항쟁의 도화선이었던 박종철 군이 물고문을 받다 숨졌습니다. 그가 죽음으로 지킨 대학 선배 박종운씨와 또 진실을 캐낸 안상수 검사는 정치에 입문했고 고문 정황을 처음으로 폭로한 오연상씨는 의사가 됐습니다. - 박혜진 앵커 멘트) 그를 역사에 되살려낸 데는 바른 길과 진실을 추구한 신문과 재야가 있었습니다. 살아있다면 40대 중반, 그가 지금 우리 사회와 언론을 어떻게 평가할지 오늘 문득 정말로 궁금해집니다."(2009년 1월 14일)

"남들은 앵커를 좋아하는지 모르겠는데 저는 그렇지 않아요. 저는 폭풍 치는 현장에 있고 싶고 보도를 지휘하면서 훌륭한 뉴스편집자가 되고 싶습니다."(1998년 <MBC 가이드> 초대석 인터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