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냥, 있는 그대로, 그대로 받아주세요
경청(傾聽)의 힘
살다가 정말로 힘든 일이 생겨 왠지 누군가와 이야기를 하고 싶어질 때, 주로 어떤 분을 찾게 되나요? 나보다 더 능력 있고 사리분별이 명확하면서 말 잘하는 친구를 찾게 되나요, 아니면 능력과는 상관없이 그냥 내 이야기를 내 편이 되어 따뜻하게 잘 들어줄 것 같은 친구를 찾게 되나요? 저 같은 경우는 주로 후자의 선택을 하는 것 같습니다. 물론 나보다 능력이 있고 사리가 분명한 사람과 이야기를 하다 보면 현재 내가 가지고 있는 문제점을 객관적으로 잘 집어주기 때문에 좋기도 하지만, 막상 정말로 힘든 일을 겪고 있을 때는 다소 단호한 이성적 조언들만 가지고는 왠지 2% 부족한 느낌입니다.
저의 경우, 미국 대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다 보면 가끔씩 좀 힘든 순간들이 있습니다. 언어적 차이에서 오는 어려운 점은 둘째 치더라도, 미국 학생들이 가끔씩 교수의 가르침에 정면으로 반박을 해오거나, 아니면 수업에 성실히 임하지 않는 것이 느껴질 때가 있어요. 이럴 땐 왠지 그런 소수 학생들을 나도 모르게 점점 싫어하기 시작하더라구요. 그럴 땐 참 마음이 많이 괴롭습니다. 왜냐면 내가 가르치는 학생을 내가 싫어하는 것만큼 교수에게 큰 고통은 없으니까요.
최근에 이와 같은 상황이 수업 시간에 발생이 되었어요. 마음이 안타깝고 괴로워서 선배 교수분 중에 누군가와 이야기를 좀 하고 싶었어요. 지금 상황을 차근차근 이야기하다 보면 저도 모르게 가슴이 좀 시원해지고 말하는 도중에 문제의 해결점이 보이는 것 같은 느낌을 예전에도 느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저도 모르게 똑똑하고 말 잘하는 철학과 선배 교수보다는, 포용력 있게 제 말을 조용조용 잘 들어주는 전직 가톨릭 수사이셨던 선배 교수님을 찾게 되더라구요. 왜 그런가 내 속을 가만히 들여다보다가 그 이유를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누군가가 나의 말을 귀기울여 들어주면 그것은 말만 잘 듣는 것이 아니에요. 얼굴 표정과 목소리에서부터 나를 있는 그대로 인정해주는 느낌과 좋아해주는 따뜻한 에너지가 느껴져요.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끝까지 하도록 중간에 말을 끊거나 화제를 바꾸지 않고 내 편에서 동감해줄 준비가 되어 있는 것이지요. 이런 상태에선 사람은 마음이 열리고 내가 확장되는 듯 한 느낌을 받습니다.
이것은 마치 다른 사람이 잘 듣고 웃어 줄수록 말하는 사람의 유머도 살아나서 그 대화가 더 재미있어지는 것과도 같은 이치예요. 왜냐하면 유머에 생명을 주는 것은, 말하는 사람이 아니고 바로 들어주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별것 아닌 것 같은 작은 아이디어도 잘 들어주는 따뜻한 상대의 기운 덕에 말을 하다보면 훌륭한 생각으로 변하기도 하고, 풀리지 않던 문제도 계속 이야기하다 보면 번쩍하고 해결점이 떠오르는 것입니다.
즉 누군가의 아픔을 치유하는 것은, 내가 그 사람이 가진 문제의 해결 방법을 다 알기 때문에 치유하는 것만은 아닌 것 같아요. 오히려 마음을 열고 잘 들어주면서 공감해줄 때, 뚜렷한 답이 없더라도 나를 인정해주는 그 따뜻함에 용기를 얻고 치유가 되요. 또한 내가 지금 겪고 있는 힘든 일이 나만이 겪는 아주 특별한 일이 아니라는 것을 상대가 확인해 줄때 안심이 되고 이것도 한때 지나가는 아픔이라는 것을 인지하게 되요.
사실 요즘 들어 우리가 트위터나 페이스북과 같은 소셜네트워크에 밤낮으로 드나드는 것도 결국 누군가가 나의 이야기를 들어주길 소망해서 그러는 것이 아닐까 생각을 해요. 어쩌면 우리는 나에게 좋은 말이나 재미있는 이야기를 해 주는 사람도 필요하지만 나의 말을 듣고 고개 끄덕여주고 나의 존재를 인정해주는 사람을 트위터나 페이스북에서 찾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주변에 힘들어하는 가족이나 친구분이 계시나요? 오늘 한 번 경청이 가지고 있는 고요한 치유의 힘을 그분과 같이 나누어보세요. 경청이야 말로 사랑과 존중의 근원적 표현이자 바탕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