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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곳에 가고 싶다

두문동재에는 가을을 여는 바람이 분다

두문동재에는 가을을 여는 바람이 분다
[도보여행] 두문동재에서 만항재까지 백두대간 길 걷기

  
백두대간 길
ⓒ 유혜준
도보여행

강원도 고한에는 가을이 성큼 다가와 있었습니다. 하늘은 높았고, 부는 바람은 무척 차가웠습니다. 걷느라고 송송 돋아난 땀이 바람의 서늘한 기운 덕분에 금방 식어버리곤 했지요. 덕분에 걷는 길이 더 상쾌하게 느껴졌습니다.

 

지난달 30일, 강원도 고한의 두문동재에서 만항재까지 백두대간 길을 걸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 길을 걸었던 흔적이 군데군데 남아 있었지요. 색색가지 리본 수십 개가 나뭇가지에 매어져 있었답니다. 이 길을 다녀갔노라, 말없이 알려주는 리본들을 보니 처음에는 반가웠습니다. 하지만 너무 많이 눈에 띄니 이 길을 걸었어도 안 온 것처럼 흔적 없이 다녀갔더라면 더 좋았을 것을, 하는 생각을 저절로 하게 됩니다.

 

사람의 손길이, 발길이 닿은 곳은 여지없이 훼손이 되곤 하기 때문이지요. 그래서 길을 걸으면서 가급적이면 흔적을 남기지 않으려고 노력합니다만 늘 그랬다고는 자신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앞으로 더욱 조심해야겠다고 다짐합니다.

 

두문동재부터 만항재까지 가는 길은 정말 걷기 좋았습니다. 급한 경사도 없고 대부분 완만한 능선 길이었지요. 걷다보면 좋다는 말이 저절로 터져 나왔으니까요. 가을이 더 깊어지기 전에 한번쯤 이 길을 걸어보는 건 어떨까요?

 

'산상의 화원'으로 불리는 만항재에서는 야생화가 이미 지기 시작했습니다. 일찍 찾아온 가을 때문이겠지요. 그래도 두문동재부터 만항재 가는 길에 야생화가 많이 피어 있어 참으로 볼만 했습니다. 계절이 조금 더 깊어지면 야생화들은 꽃잎을 떨구고 씨를 머금겠지요. 꽃이 지는 걸 보면서 삶의 무상함을 느낀다면 꽃씨를 보면서 내일의 희망을 품을 수 있을 것입니다.

 

두문동재에서 만항재 가는 길은 백두대간

 

  
주목들이 아름다운 풍경을 만들어내는 함백산
ⓒ 유혜준
도보여행

이날 걸은 거리는 얼추 21km 정도 됩니다. 두문동재부터 만항재까지는 숲길이 이어지지만 만항재부터 정암사를 지나 고한 읍내까지 가는 길은 잘 닦인 아스팔트길입니다. 거의 여덟 시간 가까이 걸었더니 나중에는 종아리가 묵직해지더군요.

 

이번 도보여행도 '인생길 따라 도보여행(인도행)' 회원들과 함께 했습니다. 함께 걸을 수 있는 사람들이 있어 참으로 행복했습니다.

 

이번 도보여행의 출발지는 동서울 버스터미널입니다. 목적지는 신고한. 거의 한 시간마다 버스가 있습니다. 28인승 리무진 버스라 편안하게 앉아서 갈 수 있습니다. 주말에는 미리 예약을 하지 않으면 표를 구하기 어렵다는 것쯤은 다들 아시겠지요? 인터넷으로 예약을 하시면 됩니다.

 

동서울에서 고한까지 3시간 정도 걸린다고 했으나, 토요일이라 40여 분가량 늦게 도착했습니다. 다행히 고한에서 두문동재로 가는 버스를 놓치지 않고 곧바로 탈 수 있었습니다. 고한버스터미널에서 두문동재 가는 버스가 있습니다. 두문동재 입구까지는 버스로 15분 남짓 걸립니다.

 

"뭐 하러 걸어 올라가? 버스 있어, 버스 타고 가."

 

두문동재 입구에서 버스를 내려 걸어 올라가다가 만난 할머니가 하신 말씀입니다. 버스에서 우르르 내린 사람들이 버스가 없어서 걸어가는 줄 아셨나 봅니다. 말씀은 고맙지만 우리는 걷기 위해 온 사람이지 걸어야지요. 그것도 걷기 편한 아스팔트 포장도로인데요.

 

날씨가 참 좋습니다. 파란 하늘에 흰 구름이 떠 있고 바람이 살랑거리면서 불어옵니다. 어, 그런데 살갗을 스치는 바람이 제법 서늘합니다. 어쩐 일인가 했더니 이곳 두문동재는 해발고도가 높은 지역이라 온도차가 많이 난답니다. 서늘한 바람은 땀을 금세 식혀주고 더불어 상쾌한 느낌까지 안겨줍니다.

 

길가에 여러 가지 들꽃들이 피어 있습니다. 황금색 꽃잎의 루드베키아는 꽃잎이 시들어 말라가고 있습니다. 대신 씨가 영글어 가고 있습니다. 꽃은 시들어 사라지지만 씨가 남아 다시 꽃을 피울 수 있는 것이지요. 자연의 섭리는 알면 알수록 신기할 따름입니다.

 

두문동재까지 올라가는 길은 잘 포장된 왕복 2차선의 아스팔트길입니다. 걷기는 편하나 걷는 느낌은 그다지 좋지 않지요. 오르막길이라 약간 숨이 가쁘게 합니다. 길옆에는 풀과 나무가 우거져 있습니다. 자동차는 아주 드물게 지나갑니다.

 

두문동재에는 서늘한 바람이 분다

 

  
두문동재 표지석
ⓒ 유혜준
도보여행

삼십여 분쯤 걸어 올라가자 두문동재 표지석이 보입니다. 해발 1268미터. 이 정도 높이니 부는 바람의 온도가 평지와 다를 수밖에 없겠지요.

 

표지석 옆에 산불감시초소가 있고, 감시원들이 있습니다. 이 분들, 참 친절하십니다. 백두대간 길, 잘 보존해서 후손에게 물려줘야 하니 야생화 하나라도 다치지 않게 조심해달라고 당부를 하십니다. 옳으신 말씀이지요. 자연의 혜택을 오래 누리고 자손들에게 남겨주려면 내 것인양 아니면 내 것보다 더 귀한 것인양 아끼고 가꾸어야겠지요.

 

감시초소 뒤쪽의 시원한 그늘 아래에서 준비해간 도시락으로 점심을 먹고 은대봉을 향해 출발합니다. 나무와 풀 사이로 한 사람이 편하게 지나갈 수 있는 오솔길이 나 있습니다. 나무 덕분에 길에는 그림자가 조금씩 드리워집니다. 길을 걸을 때 다리가 풀을 스치는 소리가 서걱거리면서 들려옵니다.

 

길을 걷다가 숲을 둘러보니 나무가 빽빽하게 들어차 있습니다. 많은 나무들이 만들어낸 그림자가 숲을 어둡게 하는데 그 사이로 햇빛이 스며듭니다. 심호흡을 크게 합니다. 숲의 정갈한 기운이 몸속으로 스며듭니다. 나무와 풀이 우거진 숲 속을 걷노라면 숲의 향기를 만끽할 수 있는 삼림욕은 덤입니다.

 

숲에서 빠져나와 앞을 보니 완만한 곡선의 봉우리가 보입니다. 경주에서 많이 볼 수 있는 고분처럼 보입니다. 강원도의 산이 이렇게 부드러운 곡선을 품고 있다니 놀랍습니다.

 

두문동재에서 함백산 가는 길에는 주목이 많습니다. 주목은 보호해야 하는 나무로 함부로 훼손하면 처벌을 받을 수 있답니다. 길을 걸으면서 주목의 자태에 놀라고 감탄하고 발길을 멈추기도 합니다. 주목을 배경 삼아 사진을 찍기도 합니다.

 

은대봉의 높이는 1442.3m. 제법 높은데 가는 길이 험하지 않고 걷기 좋은 길인 것이 신기합니다. 두문동재부터 만항재까기 가는 길은 백두대간의 일부입니다. 그래서인지 백두대간 종주를 알리는 리본들이 아주 많이 매달려 있습니다. 다른 곳에서는 보지 못한 풍경입니다.

 

리본의 색깔도 참으로 다양합니다. 빨강, 노랑, 하양, 파랑. 나뭇가지에 매달린 리본들이 바람에 펄럭입니다. 그걸 보니 서낭당에 매달린 원색의 천 쪼가리 같다는 생각이 불쑥 듭니다. 리본이 한두 개 매달려 있을 때는 몰랐는데 나뭇가지마다 적게는 열 개 정도에서 스무 개 정도 이상이 매달려 있는 것을 보니 그다지 아름답다는 생각이 들지 않네요.

 

마음속에만 흔적을 남기면 안 될까, 하는 생각도 더불어 들었습니다.

 

나뭇가지에 매달린 리본들, 백두대간 종주를 알리네

 

  
리본들
ⓒ 유혜준
도보여행

함백산에 야생화가 많다더니 맞네요. 걷는 길마다 색색가지 꽃들이 피어 있습니다. 특히 보랏빛 꽃이 많습니다. 하긴 요즘 벌개미취가 한창입니다. 그런데 이곳에는 개미취와 구절초 등과 같이 무더기로 피어 있네요. 길을 걷다가 야생화에 자꾸 눈길을 빼앗겨 걸음이 더뎌지곤 합니다. 주홍빛 동자꽃, 참 곱습니다.

 

어렸을 때 장미가 세상에서 가장 예쁜 꽃이라고 들었습니다. 그래서 그런 줄 알았지요. 하지만 요즘은 그렇지 않다는 사실을 깨닫고 또 깨닫습니다. 세상에 가장 예쁜 꽃은 없습니다. 꽃들은 저마다 아름다움을 간직하고 있고, 그것을 서로 비교한다는 것은 아무 의미가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지요.

 

아, 드디어 함백산 정상에 도착했습니다. 이곳의 높이는 1572.9m. 표지석 앞에 서니 바람이 붑니다. 처음에는 시원하게 느껴졌던 바람이 나중에는 추위를 느끼게 합니다. 배낭에서 바람을 막아주는 얇은 겉옷을 꺼내 입습니다.

 

야생화의 천국이라는 만항재가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걷기 좋은 오솔길은 여전히 이어지고 있습니다. 가끔은 돌길이 나오고, 오르막길과 내리막길도 이어지지만 험하다고 할 수 없는 길입니다. 물론 처음 걷는 사람들에게는 힘겨울 수도 있습니다만 조금 천천히 걸으면 됩니다. 나무를 보고, 들꽃을 보고, 풀을 보고, 하늘을 보고, 구름을 보고, 바람을 느끼면서.

 

만항재에는 야생화 탐방로가 있습니다. 길을 아주 잘 만들어 놓았습니다. 야생화가 한창이던 지난주까지 야생화 축제가 열렸답니다. 이제는 꽃이 지기 시작하는 계절입니다. 군데군데 시든 꽃들이 보입니다. 세상에는 영원한 것이 없다지요. 아름답게 피어난 시기가 있다면 꽃잎을 떨구고 씨를 머금어야 하는 시기도 있는 법. 그것이 세상의 이치인 것이지요.

 

야생화 탐방로를 천천히 둘러봅니다. 꽃이름을 알려주는 표지판이 곳곳에 있습니다. 표지판의 사진과 이름을 보고, 꽃들과 비교합니다. 아, 저게 오이풀이야. 저게 노루오줌이고, 저건 뚝갈. 하지만 돌아서면 꽃이름을 금방 잊습니다. 야생화의 이름을 한꺼번에 다 외우는 건 불가능에 가깝지요. 한 번에 두어 개씩만 알아둔다면 점점 이름을 아는 야생화가 많아지지 않을까, 합니다. 그래서 이름을 죄다 외우려는 욕심을 버렸답니다.

 

만항재, 야생화의 천국

 

  
만항재 야생화 탐방로
ⓒ 유혜준
도보여행

만항재는 해발 1330m입니다. 함백산에서 내려오는 길에 있지요. 함백산에서는 하늘과 가까운 길을 걷고 있다는 생각을 했는데 걷다 보니 점점 하늘과 멀어지네요. 아쉬운 마음에 하늘을 올려다보고 또 봅니다.

 

조금씩 날이 어두워지기 시작합니다. 이 날 도보여행의 최종 목적지는 고한 읍내입니다. 만항재에서 고한 읍내까지 가는 버스가 있지만 탈 예정은 처음부터 없었습니다. 10km가 넘는 거리지만 잘 포장된 아스팔트길이라 걷기는 그리 나쁘지 않습니다. 게다가 내리막길이라 걷다 보면 가속도까지 붙어 발걸음이 저절로 빨라집니다.

 

만항재에서 고한 읍내까지 가는 길 중간에 우리나라 5대 적멸보궁 중의 하나인 정암사가 있습니다. 안타깝게도 정암사에 도착했을 때 사위가 캄캄해져 버렸습니다. 그렇지 않았더라면 정암사를 찬찬히 둘러볼 수 있었을 텐데 아쉬웠습니다. 어쩔 수 없이 다음을 기약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정암사 입구에서 산 중턱쯤에 있는 수마노탑을 우러러보았습니다. 어둠 속에서 수마노탑은 은은하게 빛나고 있었습니다.

 

어둠이 깊은 그림자를 드리운 길을 걸었습니다. 이따금 만항재 쪽으로 올라가는 자동차가 헤드라이트를 밝히고 지나갑니다. 길을 따라 걷는 것이 아니라 어둠을 따라 걷는 듯한 느낌입니다. 어둠에 잠긴 마을을 지나가자 동네 개들이 목청 굵은 소리로 짖으며 존재를 드러냅니다.

 

고한의 밤은 이미 가을을 품고 있었습니다. 긴 소매 옷을 꺼내 입어야 한기를 덜 수 있었으니까요. 그래도 맑은 공기는 걷느라고 쌓인 피로를 쉽게 풀어줍니다. 계절이 더 빨리 오는 곳, 고한에서 하룻밤을 잤습니다.

 

참, 주말에는 강원랜드의 카지노 때문에 고한에서도 미리 예약을 하지 않으면 방을 구하기가 어렵다고 합니다. 그래서 방값도 비싸다는군요.